'기독교 관련/스크랩'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3.06.11 무력함과 기도
  2. 2011.06.14 영적인 분별력
  3. 2011.06.14 왕밍따오와의 인터뷰
  4. 2011.06.14 로제타 홀의 편지
  5. 2011.05.05 영혼의 냉담함
  6. 2011.03.12 다섯 형제의 비유
  7. 2011.03.12 예수의 정체성

어린 아이들은 무력함(helplessness)에 익숙하지만, 그에 비해 어른들은 무력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종종 잊어버린다. 나는 무력함이 정말 싫다. 나는 나의 생각과 계획, 또는 아마도 나의 문제를 들어줄 친구를 필요로 한다. 나는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세상 모든 일에 이러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기도 세미나를 인도하고, 기도에 대한 책을 쓴 적도 있지만, 일년 전까지는 정기적이고 조직적인 기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나는 무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생각도 언급도 해본적은 없지만, 나의 삶은 그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력함은 내가 인도하던 세미나의 핵심 주제였지만, 나는 내 세미나에 대해서 무력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나는 우리의 세미나 사역이 진전이 없어졌을 때에야, 이에 대해 주기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때는 내가 무력해졌을 때였다.

- A Praying Life / pp.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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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크리스천이 스스로 악에 맞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몇몇 사람은 거짓 교리에 맞서 바른 교리를 방어하는 유일한 길은 거짓 교리를 연구하여, 개론뿐만 아니라 미묘한 차이에도 능통해서 이를 반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주위에도 바른 교리보다는 사이비 종교 연구에 더욱 심취한 사람이 있다. 어떤 크리스천은 철학이나 오락거리, 사회 문화에 더욱 심취한 사람이 있다. 이러한 전략이 불신자들을 인도하는 데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이 강조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 우리가 말하는 초점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거짓 교리는 당장 버려야 한다.

모든 악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도망치거나, 은둔자처럼 몸을 사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악을 판별하는 전문가가 되라는 기대 또한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고민에 대해,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충고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위조 지폐를 분석해서 위조 지폐를 찾아내는 훈련을 하지 않는다. 진짜 지폐를 가지고 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연구한다. 영적으로 무장한 가짜를 추적하는 길도 이와 비슷한 훈련을 요한다. 오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정통해야 한다. 오류를 공부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오류는 던져버리고 진리를 연구하라. 견고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 그러면 바른 교훈으로 권면할 수 있음과 동시에 거슬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다. (딛 1:9). 바울이 다른 구절에도 썼듯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 분별력 / 존 맥아더 p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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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하이 우캉로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계단을 올라 아파트 301호 문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디나 다 그렇듯, 코 큰 외국인이 중국인 노부부네 문을 두드리는 것을 본 아이들이 "외국인이다!, 외국인!" 하고 왁자지껄 큰 소리로 불러대더니 다들 킥킥 웃기 시작했다. 중국 최대 도시에서 조차도 1990년대 후반에는 외국인들이 많아졌으니, 1985년은 아직 외국인이 그다지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방문은 중국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나는 이날 만날 사람에 대해서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박해 아래 중국 기독교인의 용기와 성결함의 표상이 되어왔다. 중국 기독교인과 종교 상황을 지켜보는 외국인들 모두에게 왕밍따오(Wang Mingdao, 1900-1991)은 20세기 중국 기독교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수감되기 전과 수감중에 다른 중국 기독교인 수백 명의 삶에 끼친 그의 영향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는 정치적인 의미없이 중국 기독교계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로 통했다.

 

왕밍따오는 1955년과 1958년에 체포되어 1980년 초까지 총 22년 10개월 간 수감되었다. 그의 죄목은 그가 "반혁명적" 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이끌던 교회인 베이징 기독도회당이 중국 개신교 전체를 통제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새로 조직한 허수아비기관인 삼자애국운동에 가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 선교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1980년에 루스 벨 그래함(Ruth Bell Graham)-유명한 미국 전도자의 부인이자, 감리교 중국선교사인 미국인 르뮤엘 넬슨 벨 박사의 딸-이 사적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에 노동개조소에서 풀려난 지 몇 달 안된 왕밍따오에게 존경을 표하기 원했고, 나는 그녀를 대신해 그를 방문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왕밍따오가 어떻게 수십 년 간의 긴 수감생활을 버텼으며, 지금은 어떠한지 궁금했다. 연락책이 알려준 대로 노크를 몇 번 하고 "슈슈! 슈슈!"(삼촌)하고 불렀다. 친절해 보이는 백발의 여자분이 문을 열고는 작은 주방을 지나 노년의 부부가 기다리는 3평 남짓한 좁은 거실로 나를 안내했다.

 

그는 중산복(인민복, 중국식 정장)을 입고 머리에 모자를 쓴 자그마한 노인이었다. 그는 가는 테 안경을 끼고 벽쪽 의자에 앉아서 가슴에 놓인 구식 보청기를 만지면서 가끔 휘파람 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아래턱을 반쯤 벌리고 이가 거의 다 빠진 입을 드러내면서 자주 웃었다. 그는 아직도 읽을 수는 있으나 매우 힘들며, 큰 돋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보다 8살 아래인 부인 드보라(류징원)도 온화하고 말씨가 고상했으나, 남편과 떨어져 노동개조소에서 보낸 15년 동안 건강이 많이 상했음이 분명했다. 그녀의 오른쪽 눈은 뿌옇고 시력을 거의 잃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또렷해서, 가끔씩 왕밍따오가 나의 중국어 질문을 놓칠 때면,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주곤 했다.

 

우리는 그의 수감 생활, 그래함 부인 등 외국인과의 만남, 삼자("공산당의 종교 통제 수단"에 대한 그의 태도와 중국 교회 – 중국 전역에서 교회가 급속히 생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에서 훌륭한 지도력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궁금했다. "말씀." 그는 "말씀"이라고만 말했다.

 

이윽고 시간이 다 되었다. 낯선 외국인 방문자에게 허락된 90분이 지나고 나느 그의 정중하고 따뜻한 환대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갑자기 그가 혼자서 일어서더니 차렷 자세를 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19세기 찬송가인 "믿는 사람은 군병같으니"를 영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일어나서 그와 함께 찬양을 불렀다

내가 아주 특별한 인물을 만났음을 알았다. 그에게는 그리 힘들게 여겨지지 않았던, 그의 오랜 시련의 삶을 미루어볼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베이징에 오신 예수님 p 7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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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셔우드홀과 딸 에디스의 선교지에서의 순교 이후,

로제타 홀이 에디스가 죽은지 2년째 되는 날인 1900년 5월 23일,

사랑하던 딸 에디스에게 쓴 일기.

 

회복과 부흥의 열매는,

애통하는 자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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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엄마와 셔우드는 중국 상하이에 있다. 우리의 사랑하는 에디스가 떠난 지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노블씨의 루스, 존스씨의 아이 그레센, 아펜젤러 씨의 아리 메리를 볼 때마다 "에디스가 살아 있다면..." 하고 그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엄마가 이렇게 감상적인 것은 아마도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에디스를 잃은 슬픔이 날이 갈수록 더 견디기 힘들어지는구나...

 

이 일기를 쓴 지 얼마 안되어 엄마는 상하이에 거주하는 피치부인과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에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것 같다. 엄마도 그렇게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동안 엄마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려고 수없이 노력했다. 어떤 때는 아빠의 도움까지 청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체념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성품은 다들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경험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엄마는 더 훌륭한 영적인 경험을 갈망하고 있다. 나는 나의 이삭을 제단에 바쳤으며 하나님께 최대의 봉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를 맡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빼앗아가신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이 시련의 뜻을 알고자 노력했다. 한 번도 이에 반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에는 식별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교훈이 점점 희미해져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요즘은 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보다 더 내 인생의 아픔이 깊게 느껴진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피치 부인은 엄마가 느끼는 이러한 아픔은 당연한 감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예수님의 뜻으로 돌리고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엄마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엄마가 그렇게 노력한 것은 다른 어떤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내게 주어진 이 아픔이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 중의 하나라고 인식하여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이런 시련을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더욱 더 잘 믿고 의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다.

 

이러한 내 심정은 기독교인인 선교사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가장 두려운 시련이다. 엄마는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삐뚤어졌는지를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신을 스스로 진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문제의 하나는 이러한 손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가운데 하나라고 믿지 않으려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엄마는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야 하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훗날에는 상처를 감싸안기만 하고 치유를 거절한 셈인 자신의 어리석고 짧은 안목을 인정하게 되겠지.

 

그러나 지금까지 엄마는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 심정은 차마 글로 쓰기조차 두렵다. 엄마의 심정이 이처럼 잘못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치유시켜주신다면 엄마는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다스려야 할 터인데 어떻게 내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구나. 내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참으로 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엄마는 생각할수록 나의 어리석음을 인식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갔다. 당분간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한다. 아빠는 엄마를 지극히 사랑했으므로 엄마의 영혼이 훌륭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이 불쌍한 바보. 엄마는 이제야 자신이 무분별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엄마를 자비스럽게 대해주실 것이다. 성령은 부족한 엄마의 믿음에 신앙심이 충만하도록 인도해 주시리라.

 

- 닥터 홀의 조선회상 pp.198 -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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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된 행동을 직면하여 그것을 변화시키지 않았고,

능력과 은사들을 개발하여 사용하지 않았고,

그렇게 몇 주가 몇 달로,

몇 달은 몇 년으로 이어져,

어느 날 당신은 당신이 살지 못했던 삶을 되돌아보네.

친밀하고 솔직한 대화를 결코 하지 않았고,

위대하고 담대한 기도를 결코 하지 않았고,

모험을 감행하는 즐거움을 몰랐고,

희생의 헌물을 드리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네.

이제 당신은 시든 영혼과

잊혀진 꿈에 기대어 앉아 있네.

그리고 절박한 필요를 가진 세상과

당신을 당신 자신보다 더 큰 일의 일부로 부르시는 크신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깨닫네.

당신은, 될 수 있었지만 결국 되지 못한 사람을 보네.

당신은 당신의 소명을 따르지 않았네.

당신은 결코 배 밖으로 나가지 않았네.

 

- 그렉 르보이 / 영혼의 냉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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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산성에 다섯 형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맏형은 아버지께 순종했으나 나머지 네 아들들은 아버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산 아래 흐르는 강가에 가지 말라고 늘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맏형을 제외한 네 아들들은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물살에 떠내려갈지 모르니 강변 가까이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아들들은 강가에 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네 명의 반항적인 아들들은 매일 조금씩 강 가까이 다가갔고 결국에는 그 중 한 형제가 배짱 좋게 강물에 손을 대보려고 하기까지 했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내 손을 꼭 잡아줘."

다른 세 명의 형제들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가 강물에 손을 집어넣자마자 강한 물살이 그와 그의 형제들을 급류 속으로 삼켜버렸고 그들을 강 하류로 급하게 밀어내렸다.

 

암초에 몸이 튕겨져 나가는가 하면 소리소리 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떠밀려 내려가기도 하고 솟구치는 물살에 두둥실 떠오르기도 했다. 살려달라는 외침은 포효하는 강물소리에 파묻혀버렸다.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강한 물살을 거스를 힘이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의 사투 끝에 그들은 강물의 무서운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강물은 마침내 낯선 땅, 먼 나라, 척박한 곳의 한 강가에 그들을 토해냈다.

그 땅에는 야만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은 그들의 고향처럼 안전한 곳도 못 되었다.

그 땅은 사방이 바위투성이의 산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곳은 그들의 고향처럼 살기 좋아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네 형제는 자신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았다. 아무도 이런 곳에 올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린 네 아들은 한동안 강 언덕에 누워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들은 용기를 내어 다시 강가로 향했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물살이 너무 거셌다. 강의 가장자리로 걸어가려는 것도 땅이 너무 험해서 쉽지 않았다. 산으로 올라갈 생각도 했으나 너무 높았고 게다가 그곳 지리에 익숙치도 못했다.

결국, 그들은 한곳에 불을 피우고 불가에 둘러앉았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했어야 했는데... "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집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어."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들은 낯선 땅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나무 열매를 따먹는가 하면, 동물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기도 했다. 그들은 고향 땅을 잊지 않을 뿐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리라는 희망도 버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매일 날이 밝으면 그들은 먹을 것을 구하고 거처를 마련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밤이 찾아오면 불을 피워놓고 아버지와 큰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형제는 아버지와 큰형을 다시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둘째 아들 -롬 1:18-32

그러던 어느 날 밤, 둘째 형이 불가에 오지 않았다. 나머지 세 형제는 다음날 아침 그가 미개인들과 함께 계곡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풀과 진흙으로 오두막을 짓고 있었다.

"허구한 날 이야기만 하는 것에 질렸어. 지난 일을 기억한들 무슨 소용이 있지? 게다가 이곳은 살기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나는 여기에 멋진 집을 짓고 정착하겠어."

"하지만 여기는 우리 고향 땅이 아닌 걸."

나머지 형제들이 반대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너희들이 고향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으면 이곳이 새로운 고향이 될 수 있어."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아버지가 어떻다는 거야? 아버진 여기에 안 계셔. 가까이 계시지도 않고, 언제까지 아버지가 이곳에 와 주시기만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허비해야겠니? 나는 요사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있어. 새로운 생활방식도 배우고 있지. 아버지가 오시게 되면 오시는 거고, 그렇다고 숨을 죽이고 살지는 않겠다는 말이야."

하는 수 없이 나머지 세 형제들은 오두막을 짓고 있는 둘째 형을 남겨두고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불가에 둘러앉아 고향 얘기를 하며 귀향을 꿈꾸었다.

 

셋째 아들 -롬 2:1-11

어느 날 셋째가 불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두 형제는 셋째 형이 산허리에서 둘째 형의 오두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말이지 역겨워서 봐줄 수가 없어."

셋째 형은 동생들이 다가오자 그들에게 말했다.

"둘째 형은 완전히 실패자야. 우리 집안의 모욕거리라고. 너희들은 둘째 형이 한 짓보다 더 비열한 행동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오두막을 세우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겠다고?"

"둘째 형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막내가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우리도 잘못한 것은 마찬가지잖아. 우리는 아버지 말씀에 불순종했어. 강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모두 강가에 갔잖아. 우리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했어."

"글쎄, 우리가 한두 가지 실수를 했을는지는 몰라도 저기 저 오두막에 있는 비열한 형에 비하면 우리는 성인이나 마찬가지야. 아버지는 우리 세 형제의 죄는 가볍게 넘기시겠지만 둘째형에게는 분명히 벌을 주실 거야."

"형, 우리에게로 돌아와. 돌아와서 우리랑 얘기 나누면서 지내자."

동생들이 간청했다.

"아니, 나는 여기에서 둘째 형을 감시할 거야. 우리 중 누군가는 여기 이렇게 서서 둘째 형의 잘못된 행동들을 자세히 적어두었다가 아버지께 보여드려야 하니까."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 두 동생은 그들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둘째 형은 오두막을 짓고 셋째 형은 그를 감시했다.

 

넷째 아들 -롬 2:17-3:20

나머지 두 아들은 불가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고향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막내아들은 잠에서 깨어나 옆에 있어야 할 넷째형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넷째형을 찾아 나섰다. 넷째는 강가에서 바위를 쌓고 있었다.

"기다려봐야 아무 소용없어."

바위를 쌓고 있던 넷째 형은 막내 동생이 다가오자 일을 계속하면서 자기 생각을 밝혔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여기까지 오시지는 않을 거야. 내가 아버지께 가야 해. 나는 아버지께 큰 죄를 범했어. 아버지를 모욕하고 실망시켜드렸어. 이제 남은 선택은 한 가지뿐이야. 강을 거슬러 올라갈 길을 만들어 아버지께 돌아갈 거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가 계신 성에 이를 때까지 바위를 쌓고 또 쌓을 거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일했는지 아버지께서 보신다면 당장 성문을 열고 나를 집안으로 맞아주실 거야."

 

큰 아들과 막내 아들 -롬 3:21-35

막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다시 불가로 돌아왔다. 이제 그 혼자였다. 어느 날 아침 막내는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너희들을 집으로 데려오라고 나를 보내셨다."

막내는 눈을 들어 큰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 우리를 데리러 와 주었구나!"

막내는 기뻐 소리쳤다. 큰형과 막내는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꼭 껴안았다.

"네 형들은 어디 있니?"

큰형이 물었다.

"둘째 형은 이곳에 집을 지었고, 셋째 형은 둘째 형을 감시하고 있어. 그리고 넷째 형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길을 만들고 있고."

큰형은 나머지 형제들을 찾아 나섰다. 그는 먼저 풀로 엮어 만든 오두막을 찾아 계곡으로 향했다.

"썩 물러가시오!"

둘째가 창문 너머에서 소리쳤다.

"남의 집 앞에서 함부로 얼쩡거리지 말란 말이오!"

"너를 집에 데려가려고 이렇게 온 거야."

"그게 아니겠지. 내 저택을 빼앗으러 온 거겠지."

"이건 저택이 아니야. 보잘것없는 오두막일 뿐이라고."

첫째가 응수했다.

"이건 저택이오! 이 저지(低地)에서는 가장 좋은 집이란 말이오. 내가 손수 이 저택을 지었소. 그러니 당장 가시오. 누구도 내 저택을 넘볼 수 없소."

"아버지가 계신 집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니?"

"내게 아버지 따윈 없소이다."

"넌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산 위의 큰 성에서 태어났어. 그곳은 매우 따뜻하고 과일도 많이 열리는 곳이지. 너희들이 아버지 말씀에 불순종하는 바람에 머나먼 이곳까지 오게 된거고. 그래서 내가 너희를 데리러 온 거야."

그러자 둘째는 꿈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내는 듯한 표정으로 창문 너머로 큰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집안에 있던 미개인들이 갑자기 창가로 몰려나와 소리쳤다.

"침입자, 썩 꺼져버려! 여긴 당신 고향이 아니야."

"당신들 말이 맞소."

큰형이 응수했다.

"하지만 여긴 내 동생의 고향도 아니란 말이오."

이때 두 형제의 눈길이 다시 마주쳤다. 오두막을 지은 둘째는 한번 더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으나 이미 미개인들에게 빼앗겨버린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저놈은 당신의 저택을 탐내고 있는 거야. 어서 쫓아버려!"

그들이 소리쳤다.

둘째는 그들의 말에 따라 형을 내쫓았다.

이제 큰형은 셋째를 찾아 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야만인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오두막 근처의 언덕에 앉아 둘째를 감시하고 있었다. 큰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가 환성을 질렀다.

"큰형이 이렇게 와서 둘째 형의 소행을 보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둘째형이 아버지 산성을 완전히 등지고 있는 걸 알아? 고향집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형이 이렇게 와줄 줄 알았어. 그동안 둘째형이 저질러온 소행을 빠짐없이 기록해놓았지. 둘째형을 혼내줘! 내가 옆에서 거들어줄 테니까. 둘째 형은 욕을 먹어 마땅해! 형, 어서 시작해."

첫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보다 먼저 네 죄부터 처리할 필요가 있겠구나."

"내 죄라니?"

"너도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어."

셋째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거? 내 죄는 아무것도 아니야. 저기에 진짜 죄인이 있다고."

그는 손으로 오두막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곳에 살고 있는 미개인들에 대해 말해볼게."

"먼저 네 자신에 대해서 말해보지 않겠니?"

"내 문제는 걱정할 것 없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줄게."

셋째는 오두막을 향해 달려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보자, 형. 창문으로 오두막 안을 들여다보자고. 둘째형은 나를 알아보지 못해. 같이 가, 형."

그는 오두막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큰형이 자기를 따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번에 첫째는 강가로 향했다. 거기에서 넷째를 발견했다. 그는 무릎까지 물이 차는 것도 아랑곳없이 바위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데려오라고 나를 보내셨다."

넷째는 큰형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이야기할 수 없어. 일해야 해."

"아버지는 너희들이 잘못을 범한 사실을 알고 계셔. 하지만 너희들을 용서해주실...."

"그래, 용서해주실지도 모르지."

넷째가 첫째의 말머리를 끊었다. 그는 거센 물살에 밀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내가 먼저 산성에 도달해야 해. 강을 거슬러 올라갈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우선은 아버지께 내가 얼마나 훌륭한 아들인지 보여드리고, 그 다음에 용서를 구할 거야."

"아버지는 이미 너희들을 용서하셨어. 집으로 데려가는 일은 내게 맡겨. 아무리 애써도 너는 그 길을 만들지 못할 거야. 강은 생각보다 무척 길거든. 이 일은 너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야. 아버지께서 너희를 데려오라고 나를 보내셨어. 그러니 내 말을 들으렴."

바위를 쌓던 넷째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큰형을 쳐다보았다.

"형,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어? 아버지는 그렇게 쉽사리 잘못을 용서해주시는 분이 아니셔. 나는 죄를 지었어. 그것도 아주 심각한 죄를 지었다고! 아버지께서 강을 멀리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말씀에 불순종했어.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야. 난 더 많이 일해야 해."

"그렇지 않아. 넷째야. 그렇게 힘들여 일하지 않아도 돼. 네게 필요한 건 노역이 아니라 큰 은혜란다. 여기서 아버지 집은 머무 멀리 떨어져 있어. 고향집까지 길을 놓을 힘도 모자랄 뿐 아니라 바위도 턱없이 부족해. 아버지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를 보내셨어. 너희들을 집에 데려오기를 원하고 계셔."

"지금 내가 이 일을 못할 거라고 말하는 거야? 이 일을 하기에는 내 힘이 부족하다고? 내가 닦아놓은 길을 봐. 튼튼한 바윗길을 보란 말이야. 이미 다섯 걸음이나 왔는걸!"

"하지만 앞으로도 수백만 킬로미터는 더 가야 해!"

넷째는 씩씩거리며 큰형을 노려보았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당신은 악마야. 나를 꾀어서 이 거룩한 사역을 못하게 하려고 하는 거, 다 안다고! 독사 같은 놈, 내 뒤로 물러나거라!"

그는 이제 막 쌓으려던 돌덩이를 큰형에게 집어던졌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단자, 당장 이 땅을 떠나버려! 당신은 나를 방해하지 못해! 나는 이 길을 완성한 후에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갈 거야. 그러면 아버지께서도 나를 용서해주실 거야. 내 힘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내고 말거야. 아버지의 자비를 얻어내고 말 거라고!"

첫째는 고개를 저었다.

"쟁취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란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자비도 자비가 아니고. 이렇게 간청하니 이 형이 너를 데리고 가게 해다오."

넷째는 대답 대신 바윗덩어리를 집어던졌다. 큰형은 하는 수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막내는 불가에 앉아 큰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형들은 안 와?"

"응, 안 오겠대. 둘째는 욕망의 삶을, 셋째는 비판의 삶을, 넷째는 고역의 삶을 택했더구나. 우리 아버지를 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서 다들 이곳에 계속 남아 있겠다고 한단 말이야?"

큰형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그래."

"우리는 아버지께 돌아갈 거지?"

막내가 물었다.

"그러자꾸나."

"아버지께서 나를 용서하실까?"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나를 보내셨겠니?"

결국 막내는 큰형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오다(11~21p) - 맥스 루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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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저) 중의 일부 내용임을 명시합니다. (206p~214p)

 

트리니티 신학교의 신약학 연구 교수인 카슨(donald A. carson)박사와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 하나님처럼 살고 하나님처럼 용서함

 

나는 왜 그가 처음부터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지에 첫 질문의 초점을 맞췄다. "예수의 어떤 말과 행동 때문에 그가 하나님이라고 확신합니까?" 라고 내가 물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대답할지 확실히 몰랐지만, 예수의 기적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빗나갔다.

 

카슨 박사는 커버가 씌워진 편안한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대답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을 이유로 들겠지만 예수님 아닌 다른 사람들도 기적을 행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을 암시해 주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못 됩니다. 물론, 부활이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해줍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뚜렷한 증거는 그분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요?" 나는 그의 얼굴을 좀더 잘 보기 위해 의자의 위치를 그의 의자와 똑바로 맞추면서 말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요점은, 만일 당신이 나에게 어떤 해로운 일을 했다면, 나에게 당신을 용서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해를 끼쳤는데 다른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도전하는 것이기 떄문입니다.

다윗이 간통을 저지르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게끔 했을 때, 결국 그는 시편 51편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꼐 죄를 지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 유대인들은 그 말이 신성 모독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즉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저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고 선언하는 부분이 예쑤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는 죄를 용서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속성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서구 역사를 통틀어 가장 거룩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가장 잘 깨달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단점 많고 정욕에 빠져 있고 분노가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정직하게 그런 죄들과 싸웠습니다. 사실 그들은 죄와 잘 싸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서 '거룩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십시오. 어느 누가 얼굴을 똑바로 들고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있느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제가 그렇게 말했다면 제 집사람과 아이들과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즉시 들고일어나서 저의 죄를 낱낱이 증언할 겁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것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 특성이다. 하지만 예수와 하나님의 모습이 일치하려면 이 외에도 몇 가지 속성들이 더 있어야 한다. 이제 그것들을 살펴볼 때였다. 처음인지라 카슨 박사에게 느리고 굼뜬 공을 던졌지만 이제는 커브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옮긴이 주 : 이 글은 비판적인 입장에서 신학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 창조물인가 피조물인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해 오신 지음 받지 않은 분이시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 부분에서도 일치해야 한다. 이사야서 57장 15절은 하나님을 '영존하시는 분'이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예수는 지음 받은 존재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몇 개 있다. 나는 카슨 박사에게 그 구절들에 대해 말했다. "한 예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예수가 하나님께서 '낳으신'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5절은 그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들에는 에수가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된 존재라고 명백히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카슨박사의 전공분야 중의 하나는 헬라어 문법이기 때문에 그는 헬라어 원문을 가지고 두 구절을 설명했다.

 

"요한복음 3장 16절부터 살펴보죠. 헬라어 원문을 '독생자'라는 말로 번역한 성경은 KJV입니다. 이 번역이 맞는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 구절을 성육신 - 즉,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다는 사실-과 연관시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헬라어 본문의 원래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은 '유일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1세기에는 그 말이 '유일하고 가장 사랑하는'이란 의미로 자주 쓰였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혹은 NIV가 번역한 것처럼 '하나뿐이고 유일한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존재론적으로 때에 맞춰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 구절이 또 남아 있습니다."라고 나는 지적했다.

 

"좋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도 살펴보죠. 그 구절에는 '먼저 나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보수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합니다. 구약에서 '장자'는 상속 법에 따라 일반적으로 유산의 대부분을 상속받았습니다. 왕가에서는 장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기원 전 2세기 무렵 어떤 곳에서는 더 이상 그 단어가 '실제로 낳았다'든지 '처음 태어난 자'라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정당한 상속자의 지위에 걸맞은 군위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먼저 나신'이란 표현은 조금 혼동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박사는 "'최고 상속자'라는 말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골로새서 1장 15절이 설명되었는데도 카슨 박사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지적했다.

 

"만일 골로새서 1장 15절을 주석하려고 한다면, 골로새서 2장 9절까지의 문맥 안에서 주석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서 저자는 '그(그리스도)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라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모순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먼저 나신'이란 말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소유한다'라는 의미를 지닌 문맥의 일부분에 속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대답으로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구절들이 또 있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누군가가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까?"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잠깐 붙들어 세우신 후 그가 말한 것을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하셨던 것 같습니다. " 카슨 박사가 설명했다. "마태복음에 있는 유사구절은 좀 더 넓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셨다는 내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너는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너의 말은 겸손한 뜻으로 안부를 묻는 말이냐? 선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나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듣기 좋으라는 말이냐?'

근본적인 의미에서,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나를 선하다고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너는 정말로 네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느냐? 하나님께로만 돌려져야 할 그 말이 정말로 나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의미를 뽑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네가 말한대로 나는 그런 사람이다. 아주 정확하게 말했구나'이고 또 하나는 '감히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다음 번에는 나를 '죄인 예수'라고 불러라. 나도 똑같은 죄인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말하고 행동한 것들을 볼 때, 둘 중 어느쪽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겠습니까? "

 

수많은 성경 구절들이 예수를 '죄 없는', '거룩한', '의로운', '무죄한', '순결한' 그리고 '죄인들과 구별된' 분이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대답은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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