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하이 우캉로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계단을 올라 아파트 301호 문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디나 다 그렇듯, 코 큰 외국인이 중국인 노부부네 문을 두드리는 것을 본 아이들이 "외국인이다!, 외국인!" 하고 왁자지껄 큰 소리로 불러대더니 다들 킥킥 웃기 시작했다. 중국 최대 도시에서 조차도 1990년대 후반에는 외국인들이 많아졌으니, 1985년은 아직 외국인이 그다지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방문은 중국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나는 이날 만날 사람에 대해서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박해 아래 중국 기독교인의 용기와 성결함의 표상이 되어왔다. 중국 기독교인과 종교 상황을 지켜보는 외국인들 모두에게 왕밍따오(Wang Mingdao, 1900-1991)은 20세기 중국 기독교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수감되기 전과 수감중에 다른 중국 기독교인 수백 명의 삶에 끼친 그의 영향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는 정치적인 의미없이 중국 기독교계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로 통했다.

 

왕밍따오는 1955년과 1958년에 체포되어 1980년 초까지 총 22년 10개월 간 수감되었다. 그의 죄목은 그가 "반혁명적" 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이끌던 교회인 베이징 기독도회당이 중국 개신교 전체를 통제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새로 조직한 허수아비기관인 삼자애국운동에 가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 선교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1980년에 루스 벨 그래함(Ruth Bell Graham)-유명한 미국 전도자의 부인이자, 감리교 중국선교사인 미국인 르뮤엘 넬슨 벨 박사의 딸-이 사적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에 노동개조소에서 풀려난 지 몇 달 안된 왕밍따오에게 존경을 표하기 원했고, 나는 그녀를 대신해 그를 방문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왕밍따오가 어떻게 수십 년 간의 긴 수감생활을 버텼으며, 지금은 어떠한지 궁금했다. 연락책이 알려준 대로 노크를 몇 번 하고 "슈슈! 슈슈!"(삼촌)하고 불렀다. 친절해 보이는 백발의 여자분이 문을 열고는 작은 주방을 지나 노년의 부부가 기다리는 3평 남짓한 좁은 거실로 나를 안내했다.

 

그는 중산복(인민복, 중국식 정장)을 입고 머리에 모자를 쓴 자그마한 노인이었다. 그는 가는 테 안경을 끼고 벽쪽 의자에 앉아서 가슴에 놓인 구식 보청기를 만지면서 가끔 휘파람 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아래턱을 반쯤 벌리고 이가 거의 다 빠진 입을 드러내면서 자주 웃었다. 그는 아직도 읽을 수는 있으나 매우 힘들며, 큰 돋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보다 8살 아래인 부인 드보라(류징원)도 온화하고 말씨가 고상했으나, 남편과 떨어져 노동개조소에서 보낸 15년 동안 건강이 많이 상했음이 분명했다. 그녀의 오른쪽 눈은 뿌옇고 시력을 거의 잃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또렷해서, 가끔씩 왕밍따오가 나의 중국어 질문을 놓칠 때면,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주곤 했다.

 

우리는 그의 수감 생활, 그래함 부인 등 외국인과의 만남, 삼자("공산당의 종교 통제 수단"에 대한 그의 태도와 중국 교회 – 중국 전역에서 교회가 급속히 생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에서 훌륭한 지도력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궁금했다. "말씀." 그는 "말씀"이라고만 말했다.

 

이윽고 시간이 다 되었다. 낯선 외국인 방문자에게 허락된 90분이 지나고 나느 그의 정중하고 따뜻한 환대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갑자기 그가 혼자서 일어서더니 차렷 자세를 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19세기 찬송가인 "믿는 사람은 군병같으니"를 영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일어나서 그와 함께 찬양을 불렀다

내가 아주 특별한 인물을 만났음을 알았다. 그에게는 그리 힘들게 여겨지지 않았던, 그의 오랜 시련의 삶을 미루어볼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베이징에 오신 예수님 p 77-81

Posted by kkc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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