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여러 가지 사건들을 거쳐 이집트를 떠난 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을 불신하며, 왜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꺼내셨는지, 왜 가능성이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주셨는지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악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민 14:35) 그리고, 실제로 이집트를 떠날 때 있었던 성인 남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앞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의미를 가지지만, 이 때 하나님이 할례를 명하시는 타이밍은 참 좋지 않습니다. 커다란 전쟁과 적이 바로 눈 앞에 있는 타이밍에 하나님은 할례를 명하십니다. 만약, 할례 중에 적이 이스라엘 백성을 친다면, 남자들은 (꼼짝없이) 전멸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합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러나, 이 때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겨납니다.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먹을 것의 공급이 끊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은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많은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여호수아는 여리고에 가까운 곳을 갑니다.

그 때에, 어떤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납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다가가서 묻습니다. "너는 우리편이냐 원수의 편이냐?" 그 사람은 여호수아에게 대답합니다. "아니다." 영어 성경에는 좀 더 명확한 표현으로 나와있는데, 그는 여호수아의 질문에 "둘 다 아니다(Neither)"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지도자로 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여호수아의 편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이라고 밝힌 후 신을 벗을 것을 명합니다. 성경에서 신을 벗는 다는 것은 존경의 의미와 함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과 결혼할 때에, 그 친척이 신발을 벗어 그의 합법적 권리를 포기한 것과 같이 이는 이스라엘의 풍습이었습니다. (위클리프 주석, 룻 4:7)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본문의 군대 장관을 구약에서의 예수님의 임재로 바라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해석에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군대 사령관이 여호수아의 절을 받고 행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천사와 같은 피조물은 경배를 받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요한이 천사에게 절하려 할 때 천사는 말합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피조물이니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계 19:10)" 본문이 말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본문은 전쟁에 있어서, 여호수아의 싸움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편에 자신을 내려놓는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일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것과 같이, 칼과 창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궤를 들고 여리고 성을 돌아서 성을 무너뜨리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주시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오래된 난제 중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의 편을 들어주실 것인가? 라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들의 싸움을 지지하는지, 아니면 지지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동일하게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10:6-10, 메시지)

또한, 우리가 자신의 창과 무기로 전쟁을 시작하려고 할 때, 많은 경우 하나님은 먼저 그것들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나의 힘과 열정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려놓음과 순종 가운데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하 20:15)

우리의 삶이, 내려놓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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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사랑의 첫 번째 정의는 "상대에게 성적으로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로 정의됩니다. 1) 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사랑이란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진화된 본능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의 뇌 신경론자들은 사랑이란 감정을 단순한 두뇌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랑의 감정은 도파민, 엔도르핀, 페닐에틸아민 등 생물학적 신경전달물질들의 조화로운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Frued)는 사랑의 원천은 성욕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이란 목적이 억제된 성()"이라고 말하며 사랑을 정의합니다. 로맨틱한 사랑에서 이러한 정의는 유효합니다. 실제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에 빠지기를 열렬히 원할지라도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그런 경험을 원하지 않을 때에도 사랑한다는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기도 합니다. 2) 사랑의 두 번째 사전적 정의는 정의는,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로 정의됩니다. 실제로도,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국어에서 '사랑하다'는 현대국어로 계속해서 생각하다 정도의 의미였다고 합니다. 또한 (애)라는 뜻은 지금과는 달리 아낀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3)

 

성경에서는 인간의 창조와 자유의지의 목적을 사랑으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모든 내용과 율법의 본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 22:37-40)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 인간이 사랑하는 하나님, 인간과 인간의 사랑입니다. 4) 그러나 이 관계에 있어서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단순히 영적인 존재라고만 치부하거나 또는 인간으로 오셨지만 이 천년 전에 인간으로 오셨다가 사라져버린 존재로만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과 일대일로 만나고, 대화하시고, 사랑하시고, 화도 내시고, 인간으로 오셨던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주1) 사랑이라는 전재는 인격이 있는 존재간에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아름답고 예쁜 인형이 있더라도, 우리는 인형과 사랑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인형의 버튼을 누를 때, 인형이 나에게 "I Love you"라고 말해주더라도, 우리가 인형에게 "I Love you, too"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천이 된다 라는 말을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이야기합니다. (롬 5:10) 즉, 다시 말하면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관계 안에서의 사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은 사랑을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닥 없는 웅덩이가 채워지기를 애타게 갈구하는 것과 같이 절대로 "채워짐"을 느끼지 못하고 항상 "나의 일부분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사랑이란 단순히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의존적인 기생일 수 있습니다. 스캇 펙 박사는 그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예를 이야기합니다.

 

서른 살 된 한 인쇄공이 아주 심한 우울증에 걸려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난 지 사흘 됐다고 했다. 그 부인은 그가 자기와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이전에도 세 번이나 그를 내버리고 떠나겠다고 위협을 했다고 한다. 매번 그는 아내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태도 변화를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번번히 하루 이상을 못 넘기므로, 이번에는 그 부인이 위협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그는 이틀동안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불안으로 떨고 있었으며 눈물이 그의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고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 없이는 못 살겠어요. 나는 그들을 무척 사랑한답니다."

"글쎄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게 당신 아내의 불평이 옳다고 했고, 아내를 위해서 당신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했어요. 집에는 당신이 오고 싶을 때 찾아오고, 아내에 대해서도 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흥미가 없었고, 아이들과 같이 놀아 주지도 않았고, 아무데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가족의 아무와도 관계가 없다는 소리인데,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전혀 있지도 않았던 관계를 잃었다고 당신이 왜 그렇게 우울하게 되었을까요?"

"선생님은 이걸 모르세요?" 그는 대답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아내도 없고, 아이들도 없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틀림없이 그들을 사랑했답니다. 그들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이틀 후, 그는 웃음 띤 얼굴로 명랑하게 사무실로 사뿐히 들어와서는 "모든 것이 이제 다 좋아졌습니다."하고 큰소리를 쳤다. "가족과 다시 합쳐졌습니까?" 나는 물었다. "오, 아뇨" 하고 그는 기쁘게 대답했다.

"선생님과 상담한 이후 그들한테서는 아무 소식도 못 들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어젯밤에 술집에서 한 여자를 만났어요. 그녀가 나를 참으로 좋아한다고 그러는군요, 그녀도 나처럼 똑같이 가족과 헤어졌답니다. 우리는 오늘밤에 다시 데이트를 할 거에요. 나는 새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다시 선생님을 찾아 뵙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무엇이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간의 관계가 내 뜻과 엄청나게 달라지기 시작할 때,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 시작할 때에는 깨어지기 쉬운 관계입니다.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생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각각의 독립된 인격의 교재입니다. 이는 신앙에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받고, 덜 받고, 요구하고 응답 받고, 은사를 얻는 것과 같이 우리의 욕구를 채우는 관계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란 단순히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 청년은 스캇 펙 박사와의 상담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

 

" 어머니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학교버스를 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답니다. 어머니에게 아무리 사정을 해도 학교 버스를 못 타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다칠까 봐 두려워 매일 차로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느라고 퍽이나 힘드셨을 겁니다. 어머니는 나를 정말 사랑했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참된 사랑일까요? 그는 그 청년의 소심함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사랑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고, 사랑인 것처럼 보이는 그 행동들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어쩌면 어머니의 그 행동은 헌신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청년의 자아 형성에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최 우선으로 합니다. 이는 신중한 판단과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수반합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이나,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넬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의 신시아 하잔 교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랑에 빠진 뒤 1년 후 열정의 50%가 감소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열정이 반으로 줄어드는 시기에 도달하면서 애틋한 감정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5) 이뿐 아닙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싫어하는 점을 찾아내긴 하지만, 부정적인 면은 잠시 잊은 채 좋아하는 점에만 집중합니다. 영국의 시인 Chaucer는 말합니다. "사랑은 눈이 멀었다." 6) 그러나, 우리가 이성을 찾게 되었을 때, 돌아오는 현실은 냉혹합니다. 나는 은행에 저금하기를 원하는데, 그녀는 핸드폰을 사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자기 자기 일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데, 나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취미와 편견, 그리고 생활리듬만 고집하려 들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제 정신을 차리고 사랑에서 빠져 나오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로 유명한 '스캇 펙'박사는 바로 이 순간, 즉 바로 한 쌍의 연인이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 그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참사랑을 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사랑에 빠지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며, 그것은 사랑의 크고 신비로운 전체 구도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겪은 임상적 경험을 세밀히 관찰하고 더불어 자기 관찰을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는 사랑이란 단순한 집착이나 열정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사랑의 목적을 육체적이나 물질적이 아닌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정신적인 정신적인 성장이라는 말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의지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유발시키는 의지를 의미합니다. 무척 어려운 정의이지만 그는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통해 키워나가는 대상으로 정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으므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우리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으시고, 현실 속에서 이성을 되찾았을 때,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바로 그 때가 하나님과의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발전은 의지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을 자라게 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장 첫째 계명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네 열정과 간구와 지성과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주2)


나눔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거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온전한 관계의 삶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감정이나 열정이 아닌, 매일 매일 삶 속에서의 교재와, 사랑 안에서의 진실된 의지와 행동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에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유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온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2)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3) 엔하위키, http://mirror.enha.kr/wiki/사랑

4) 성경대사전

5) Vogue (2005년4월호) 원고 중,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aroong&logNo=80013920997

6) TED, Helen Fisher tells us why we love + cheat

 

주1) 신학적 접근으로는 하나님이 인격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격을 가진 것이라고 접근할 수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격을 가진 하나님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주2) 마가복음 12장 29절, 한글 메시지 버전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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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 요한일서 4:7-12 (표준새번역)

 

오늘 본문은 요한 1서 4장 7절에서 12절입니다. 요한 1서는 사도 요한에 의해서 기록되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그는 또한 요한복음 및 요한계시록의 저자입니다. 요한 1서의 대상은 불신자가 아니라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를 대상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 글이 쓰여진 당시에는 가현설이라는 교리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는 하느님이기에, 인간으로서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예수는 사람의 탈을 쓰고 왔으므로, 사람이 아니라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교리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일 뿐이며, 그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하였습니다. 1) 2)

요한은 4장 1절부터 6절을 통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과 거짓 예언자들을 구별하는 분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친절하게 "예수 그리스도안에 복음이 있으니까, 이 거짓 복음은 이렇게 구별해야 해" 라고 말하며 영 분별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갑자기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조금은 쌩뚱맞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신학자는 "요한 사도가 반갑지 않은 주제를 대강 처리하는 거 같은데?"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3)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바울 또한 갈라디아서를 통해 "할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는 거짓 복음에 직면하여,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라고 열심히 설명하다가, 문득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14절) 그들은 사랑으로 복음을 분별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복음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요한이나 바울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셨던 기도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17장(표준새번역)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우리가 하나되기를, 그리고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의 슈퍼파워로 모든 기도가 짠 하고 이루어지는 모습을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중보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바보가 바보들에게'라는 책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남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여는 것입니다.

외적 인물이 잘나서 또는 장점이나 돈, 지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기쁨을 나눌 뿐 아니라

서러움, 번민, 고통을 함께 나눌 줄 아는 것,

잘못이나 단점까지 다 받아들일 줄 아는 것,

그의 마음의 어두움까지 받아들이고

끝내는 그 사람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남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을 만큼 함께

괴로워할 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의《바보가 바보들에게》중에서 -

 

제가 대학부 시절 목사님은 결혼식 주례 때마다 같은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것은 '좋아함'과 '사랑함'의 차이점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생각보다 마냥 아름답고 즐겁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상처에 대한 무방비 상태로 내어놓는 일입니다. 사랑은 공짜가 아닙니다. 사랑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당신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관계로 인하여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사람들의 속성에 대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비이성적이며 논리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이기적이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속셈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할 것이다.

당신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더라도 사람들은 그대를 속여서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당신이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시샘하여 질투할 것이다.

오늘 당신이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행해도 사람들은 내일이면 그것을 곧잘 잊어버릴 것이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어도 세상은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냉소적인 이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을까 의아하실 지 모르지만. 이 말은 테레사 수녀님의 시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물론 테레사 수녀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 조차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찬양했던 그 사람들에게 붙들려 배신을 당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는 곳은 지옥과 같습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네 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약해진다는 것이다. 마음을 절대 다치지 않으려거든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된다. 동물한테도 마음을 주면 안된다. 취미와 소소한 사치로 마음을 꼭꼭 동여매라. 모든 연줄을 피하라. 이기심이라는 관 속에 마음을 안전히 가둬 두라. 그러나, 안전하고 어둡고 공기가 통하지 않는 그 부동의 관 속에서 마음은 변질될 것이다. 상처도 모를 것이다. 깨질 수도 없고. 뚫고 들어갈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는 마음이 되고 말 것이다. 천국을 제외하고 사랑의 위험에서 완전히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지옥이다.

 

이와 동일하게 성경은 세상의 끝에서 참 사랑이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4)

1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3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5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 디모데후서 3장 (표준새번역)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3장 14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은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회를 하고 하고, 방언도 하고, 사람을 고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우리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의 삶에 생명에 있고, 사람들이 그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에게 소망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A new commandment I give unto you, That ye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By this shall all men know that ye are my disciples, if ye have love one to another

- 요한복음 13:34,35

 

하나님의 계명은 율법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3:23) 우리 안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참된 예수를 전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은 그것으로써 우리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눔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인 유한준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5)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보게 되고,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사랑이 때로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더라도,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야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깊이 머무르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어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요한일서 4:12) 우리 모두가 그 사랑 안에서 삶을 경영하기를 축복합니다.

 

1) 성경대사전: 요한 1서

2) 위키백과: 가현설

3) 위클리프 주석: Plummer, the Epistles, p.99

4) 디모데 후서 3장은 고린도 전서 13장과 대조하여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표준새번역)

5)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 조선 정조시대 문장가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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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유 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자유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여러분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입니까? 물론 우리들은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자유로움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유함에 대한 언급을 여러 번 하셨는데, 그때 유대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때 예수님은 대답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요 8:33-34)"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이 우리에게 늘 기쁨과 자유를 선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교사인 찰스 트럼불(Charles Trumbull)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있어 영적인 삶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나는 영적으로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살아갔지만, 때로는 바닥을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힘있는 부흥 집회, 헌신되고 구별된 크리스천 리더의 설교나, 영적인 책이나, 예배에서 헌신된 기도를 드리고 나면, 나는 기쁨을 느끼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진 기분과 함께 내 영적 삶이 더 깊어진 것처럼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작은 유혹들에 넘어지거나, 점진적인 영적 내리막을 걷게 될 때면, 나의 좋았던 경험들은 다 잃어버리고, 비참한 상태에 빠진 내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 Grace Walk, Steve McVEY, pp.16

 

이러한 고백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고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흥 집회를 갈 때나, 기도와 성경공부로 시간을 보낼 때는,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작은 유혹들에 넘어지거나,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문제에 부딪칠 때면, 우리는 패배감을 느낍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 않을 때에도, 내가 크리스천으로 행하고 살아야 하는 것들을 하지 않을 때면, 죄책감과 책임감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다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약속하고, 성경을 더 읽고, 기도를 더하고, 전도를 더하고,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비참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1)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8.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20.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 로마서 7장 18-25 (표준새번역)

 

본문 7장 21절에서 바울은 죄의 속성을 법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법칙이란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 필연적인 불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예를 들면, 여러분이 성경책을 높이 들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길게 세 시간은 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결국 이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만류인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우리는 하루, 이틀, 한달, 그리고 길게는 몇 년 동안 정결하게 살아갈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2) 하지만, 우리는 결국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싸우더라도 선해질 수 없는 희망 없는 존재들입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바울은 로마서 8장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말하는 희망은 우리가 완전해 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완전하지 않지만 정죄를 받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4.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로마서 8장 1-4 (표준새번역)

 

바울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율법에 의한 죽음의 법과, 성령의 법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간의 관계를 결혼생활에 비유하였습니다. 율법과의 결혼은 불행합니다. 해야 하는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배우자의 율법에 의해서 집에서 설거지를 하루에 2번씩 해야 하고, 주 3회 청소기를 돌리고 주 2회 물청소를 해야 합니다. 당신은 7시 이후 TV를 보지 말 지며, 무한도전을 삼가야 합니다. 그 외에도 135가지 집안일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집안과 나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이 일들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배우자가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일들을 지키지 않을 때마다, 나는 배우자에 대한 두려움과 정죄감에 사로잡혀 마음을 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참된 결혼 생활이 아닙니다. 이는 불행한 결혼 생활입니다. 이러한 결혼 생활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말합니다.

2. 결혼한 여자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풀려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그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로 갈지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5.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6.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옭아맸던 것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 로마서 7장 2-6 (표준새번역)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함께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다시 한번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 표준새번역) 바울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을 정의하며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못이 박힐 것이라는 미래형이나 지금 못을 박아야 한다는 현재형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이미 이루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진리 안에 설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줍니다. 바울은 바로 이 자유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죄는 우리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정죄감의 감정은 여전히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삶 속에서 나쁜 일이 발생하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죄 속에 빠져 있을 때마다 하늘에서 분노를 참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고, 성경을 읽고, 착한 일을 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고, 죄 속에 허우적거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은 우리의 상태가 사랑 받을 만 해서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을 받을 만하고, 앞으로 죄 짓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당신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8: 표준새번역)"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존재이고, 완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약 우리가 완전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죄의 불완전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경험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5:5). 마틴 루터는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동일하게, 성경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선하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다고 말합니다. 죄의 정말 무서운 점은 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인간의 생명에 하는 일은 가지치기용 가위가 한 떨기 꽃에 하는 일과 같습니다. 줄기를 잘라내면 꽃은 생명의 원천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처음 얼마간이야 물론 여전히 색깔도 곱고 싱싱하고 보기도 좋지만 시간을 두고서 그 꽃을 관찰해보면 잎은 시들고 꽃잎은 떨어질 것입니다. 무슨 방법을 동원해도 꽃은 결코 다시 되살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꽃 주위에 물을 뿌리고, 꽃줄기에 흙을 심고, 비료를 주고, 접착제로 꽃을 다시 원줄기에 붙여보더라도, 그 꽃은 이미 죽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잘려나간 영혼은 시들고, 결국 죽게 됩니다. 죄는 결과적으로 하루를 망치거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영혼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3) 죄의 가장 큰 파급력은 죄책감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 그리고 이로 인한 영혼의 죽음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죄들에 집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죄로 인도합니다. 이는 다이어트를 하기를 원하는 우리가, 매일 매일 피자헛의 메뉴를 묵상하는 것이나, 담배를 끊기를 원하는 우리가, 매일 "난 담배를 끊어야지"하고 아침마다 다짐하며 담배를 묵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모티브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사랑하면, 네가 율법을 지킴으로 보여주어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당연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는 뜻입니다. 조금 전 결혼 생활의 예와 같이, 우리가 정말 배우자를 사랑한다면, 배우자를 위해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3:10)

나눔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워런 W. 위어스비는 로마서 8장을 그리스도인의 자유 선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단은 계속하여 당신에 대해서 참소하며 정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8:15) 우리는 율법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은혜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무엇도 이 진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진리가, 진실로 우리를 자유케 하기를 소원합니다.

31.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6.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 로마서 8장 31-39절: 표준새번역

 

1)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은 분은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오다 (스티브 맥베이)'를 참고하세요.
2) 이 비유는 이경욱 선교사님의 강의를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3) 이 비유는 예전에 어떤 책에서 메모해놓았던 것인데,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네요. 아는 분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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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은 남 유다 시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기 전 시대를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하박국은 부패한 남 유다의 현실과, 바빌로니아를 통하여 남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 속에 서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어째서 이런식으로 일하시는 것인지, 어째서 더 큰 악을 허락하시는지, 왜 침묵하시는지 항의합니다.답이 없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하박국은 당혹감을 느끼고 상황을 이해하려다가 실패한 혼란스러움을 이야기하며, 하나님께로의 실망감을 전합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기다려 보겠다.."

= 하박국 2:1 (표준새번역)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

= 하박국 2:2-4 (표준새번역)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에 대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믿음간의 관계를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

8.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 있다" 하였습니다.     

11.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4.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갈라디아서 3장 7-16절 (표준새번역)

 

'산다' 라는 것은 단순히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사는 방식을 뒷받침하는 것은 부활, 부활, 언제나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고전 15:30-33, 메시지) 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가는 생이 삶의 전부라면, "오늘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십자가에 두는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의인이 십자가의 믿음으로 사는 것은, 부활 이후의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없는 삶에 대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없이 되풀이되는 값싼 섹스, 악취를 풍기며 쌓이는 정신과 감정의 쓰레기, 과도하게 집착하지만 기쁨 없는 행복, 껍데기 우상들, 마술쇼 같은 종교, 편집증적 외로움, 살벌한 경쟁,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만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잔인한 기질,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받을 줄도 모르는 무력감, 찢겨진 가정과 찢겨진 삶, 편협한 마음과 왜곡된 추구, 모든 이를 경쟁자로 여기는 악한 습관, 통제되지도 않고 통제할 수도 없는 중독, 이름뿐인 꼴사나운 공동체 등이 그것입니다."

= 갈라디아서 5장 19-21절 (메시지)

 

사람들이 삶 속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는 것을 쫓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과 중심에 십자가가 없다면, 비록 우리 육신은 살아있을지라도, 우리의 삶에는 생명력이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생명력은 십자가의 의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시작됩니다. 그 선하심에 의지하여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기뻐합니다. 하박국 기자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 하박국 3장 17-18절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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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달란트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마지막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인은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자신의 재산을 맡깁니다. 그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종에게 맡깁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달란트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분이 있을 것 같아 간단히 설명 드리면, 한 달란트는 6000일의 삯(드라크마)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데, 하루 일당을 5만원 정도로 계산하면 3억원 정도로 계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를 가졌던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가진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 종은 주인에게 '착하고 신실하다'라는 칭찬을 받고 주인의 더 큰 일에 참여합니다. 한편 한 달란트를 가진 종은 돈을 땅에 숨겨서 보관합니다.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하며, 그의 가진 달란트마저 뺏어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맡기게 됩니다. 이 비유는 어떤 경우 '달란트(재능)를 살려서 열심히 일하자! 파이팅!'이렇게 요약되거나 '다섯 달란트를 남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각박한 세상'과 같이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이 비유의 대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대상이 주인을 알고, 주인의 일에 참여한 사람들인 것은 명백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과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은 다르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전에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크리스천으로 사는 법에 대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태복음 25장 23절에서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표현된 주인의 칭찬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종에 대해서 본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신실함의 반대되는 단어는 신실하지 않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에서는 신실함과 게으름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신실함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국어사전에 의하면 신실함은 '믿음직하고 착실하다'라고 표현됩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신실함은 'faithful'이라고 표현되는데 이는 견고한 신뢰를 나타나내는 단어입니다. 한글 성경의 다른 본문을 보면 이 부분은 충성됨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표현인 게으른 이라는 단어는 국어 사전에 의하면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성미나 버릇이 있다.'라고 표현됩니다.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앎이나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과 우리의 행동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충성됨, 신실함은 무엇일까요? 때로 그것은 '수고'라는 이름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니까, 내 달란트를 따라서 열심히 살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2-23)" 이 사람들은 많은 일을 열심히 하였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수고'와 '일'이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이 목적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종에게 주인의 성품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었습니다. 선하신 분이 아니라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함은 '수고'로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해서 이루는 '삯'이 아닙니다. 바울은 '신실함(faithful)'에 대해서 성령의 열매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갈 5:22).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은혜' 로써 주어집니다 (갈 5:25).

 

어떠한 사람들은 이 비유에서 주인의 마지막 결정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의 상급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 과연 부러울 만한 일이었을까요?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의 회사에서 사장님이 출장 가있는 동안 여러분이 몇 가지 일을 신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때 사장님이 출장에서 돌아와서 말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사원아!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두 배의 프로젝트를 하도록 하여라." 부럽습니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의 상급은 결과적으로 많은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원래 그런 상급은 받고 싶지 않았고, 원래 땅에 묻어두었던 돈이니 없는 셈 치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뿐입니다. 이 상급은 제게 약간 충격적이었는데,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천국에서 완전 편하게 놀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에게, 주님이 오셔서 '네가 수고하였으니 두 배의 일을 하려무나.'라고 말하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주인의 일에 참여함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중에라도 '주인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좋은 성과를 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달란트를 받아서 충성되게 일할 때 높은 위치와 성공이 반드시 주어지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크리스천은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이야기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신실하게 묘사되는 믿음의 선진들은 어찌 보면 세상의 시각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유랑하며 살기도 했고, 매를 맞고 죽은 사람도 있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치욕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는 유한한 삶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열매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켈커타의 한 의원으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이런 무거운 짐스런 일들을 꺾김 없이 해낼 수 있습니까? (How can you bear the load without being crushed by it?)"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녀님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주님께, 성공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 신실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I'm not called to be successful, but Faithful)" 본문에서 주인은 '착하고 성공한(Good and Successful)'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을 '착하고 신실한 종(Good and Faithful)'이라고 칭찬합니다.

 

삶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계획하는 일들은 우리의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일하더라도, 그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성공'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함'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을 들어 써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이십니다. 신실함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은사로 주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일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삶이 충성되고 신실한 '깨끗한 그릇'일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이 이러한 삶으로,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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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때,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의 특징은 사람이 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 그 두려움으로 사람을 옭아맨다는 내용. , 인간이 신을 경외하는 것은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이 이야기를 듣던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는데, 최근 읽은 장영희씨의 수필집의 사랑과 생명이라는 글에서는 사랑에 대한 여러 정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는다 -<요한 1 4 18>

삶의 무게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한마디의 말, 그것은 사랑이다.” – <소포클레스>

삶에 있어 최상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 <빅토르 위고>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한다” – <에릭 프롬>

 

구구 절절 다 옮은 말이지만, 장영희씨는 이 중 <논어(12 10)>에 나오는 애지 욕기생, 愛之, 欲其生”,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압권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산다라는 말은 사랑의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23편은 양과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양은 스스로 똑똑한 척 하지만,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은 똑똑하지 않습니다. 양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없고, 싸울 수 있는 뿔도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무력합니다. 양은 어디에 가야 풀이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목자로 인해 양은 살 수 있습니다.

 

양에게는 푸른 풀밭이 필요합니다. 가끔, 양들은 자기에게 해가 되는 독초나 이상한 것들을 먹고도 방끗 웃으며 메에거리므로 목자가 관리하는 양들을 위한 풀밭이 필요합니다. 양에게는 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양들은 깊은 물가에 갔다가 털이 젖어서 그 무게로 인해 익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쉴만한잔잔하고 얇은 물가가 필요합니다. (23:2) 양은 철새처럼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방향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그들의 길을 인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23:3). , 늑대나 곰이 그들을 위협할 때 이빨도, 발톱도, 뿔도 없는 양들은 그들을 막대기와 지팡이로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23:4). 양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목자는 어째서 양을 돌보는 것일까요? 시편 23:3편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 요한복음 10:10,11 / 표준새번역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선한 목자는 양이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립니다.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양을 살게 합니다.

 

고대 중동에서, 다윗의 시대에는 연회를 베풀게 되면 그 중의 귀빈들에게 특별히 머리에 향기로운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잔은 손님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손님이 집에 초대되었을 때, 잔이 가득 차도록 계속 채워진다면, 그것은 손님에 대한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지거나, 주인이 손님이 지금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면 손님의 잔이 빈 채로 유지되도록 하였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잔이 채워지는 동안 손님은 그 집에서 환영 받는 존재입니다. 주인이 손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기뻐할 때는 손님의 잔이 넘쳐 상이 흠뻑 젖도록 가득 잔을 따랐습니다. 이는 주인이 손님의 방문을 너무 기뻐하며 계속하여 머무르기를 요청하는 메시지입니다.

 

원수들은 때로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를 참소하기도 하고,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원수가 보란 듯이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한 상 가득 차리시고, 우리가 그의 집에 거하기를 기뻐하십니다. (23:5).

 

세상에는 선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스스로 실망하기도 합니다. 좋지 않은 상황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낙심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단순히 양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축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을 벌고, 똑똑해지고, 유명해지고, 권력을 가지게 되더라도, 우리는 몸과 마음을 스스로 지킬 수 없습니다.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영을 받았습니다.(로마서 8:15)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희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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