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사랑의 첫 번째 정의는 "상대에게 성적으로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로 정의됩니다. 1) 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사랑이란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진화된 본능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의 뇌 신경론자들은 사랑이란 감정을 단순한 두뇌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랑의 감정은 도파민, 엔도르핀, 페닐에틸아민 등 생물학적 신경전달물질들의 조화로운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Frued)는 사랑의 원천은 성욕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이란 목적이 억제된 성()"이라고 말하며 사랑을 정의합니다. 로맨틱한 사랑에서 이러한 정의는 유효합니다. 실제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에 빠지기를 열렬히 원할지라도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그런 경험을 원하지 않을 때에도 사랑한다는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기도 합니다. 2) 사랑의 두 번째 사전적 정의는 정의는,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로 정의됩니다. 실제로도,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국어에서 '사랑하다'는 현대국어로 계속해서 생각하다 정도의 의미였다고 합니다. 또한 (애)라는 뜻은 지금과는 달리 아낀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3)

 

성경에서는 인간의 창조와 자유의지의 목적을 사랑으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모든 내용과 율법의 본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 22:37-40)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 인간이 사랑하는 하나님, 인간과 인간의 사랑입니다. 4) 그러나 이 관계에 있어서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단순히 영적인 존재라고만 치부하거나 또는 인간으로 오셨지만 이 천년 전에 인간으로 오셨다가 사라져버린 존재로만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과 일대일로 만나고, 대화하시고, 사랑하시고, 화도 내시고, 인간으로 오셨던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주1) 사랑이라는 전재는 인격이 있는 존재간에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아름답고 예쁜 인형이 있더라도, 우리는 인형과 사랑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인형의 버튼을 누를 때, 인형이 나에게 "I Love you"라고 말해주더라도, 우리가 인형에게 "I Love you, too"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천이 된다 라는 말을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이야기합니다. (롬 5:10) 즉, 다시 말하면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관계 안에서의 사랑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은 사랑을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닥 없는 웅덩이가 채워지기를 애타게 갈구하는 것과 같이 절대로 "채워짐"을 느끼지 못하고 항상 "나의 일부분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사랑이란 단순히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의존적인 기생일 수 있습니다. 스캇 펙 박사는 그의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예를 이야기합니다.

 

서른 살 된 한 인쇄공이 아주 심한 우울증에 걸려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난 지 사흘 됐다고 했다. 그 부인은 그가 자기와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이전에도 세 번이나 그를 내버리고 떠나겠다고 위협을 했다고 한다. 매번 그는 아내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태도 변화를 약속했으나 그 약속은 번번히 하루 이상을 못 넘기므로, 이번에는 그 부인이 위협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그는 이틀동안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불안으로 떨고 있었으며 눈물이 그의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고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 없이는 못 살겠어요. 나는 그들을 무척 사랑한답니다."

"글쎄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게 당신 아내의 불평이 옳다고 했고, 아내를 위해서 당신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했어요. 집에는 당신이 오고 싶을 때 찾아오고, 아내에 대해서도 성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흥미가 없었고, 아이들과 같이 놀아 주지도 않았고, 아무데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가족의 아무와도 관계가 없다는 소리인데,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전혀 있지도 않았던 관계를 잃었다고 당신이 왜 그렇게 우울하게 되었을까요?"

"선생님은 이걸 모르세요?" 그는 대답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아내도 없고, 아이들도 없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틀림없이 그들을 사랑했답니다. 그들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이틀 후, 그는 웃음 띤 얼굴로 명랑하게 사무실로 사뿐히 들어와서는 "모든 것이 이제 다 좋아졌습니다."하고 큰소리를 쳤다. "가족과 다시 합쳐졌습니까?" 나는 물었다. "오, 아뇨" 하고 그는 기쁘게 대답했다.

"선생님과 상담한 이후 그들한테서는 아무 소식도 못 들었어요. 그렇지만 나는 어젯밤에 술집에서 한 여자를 만났어요. 그녀가 나를 참으로 좋아한다고 그러는군요, 그녀도 나처럼 똑같이 가족과 헤어졌답니다. 우리는 오늘밤에 다시 데이트를 할 거에요. 나는 새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다시 선생님을 찾아 뵙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무엇이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간의 관계가 내 뜻과 엄청나게 달라지기 시작할 때,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 시작할 때에는 깨어지기 쉬운 관계입니다.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기생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각각의 독립된 인격의 교재입니다. 이는 신앙에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받고, 덜 받고, 요구하고 응답 받고, 은사를 얻는 것과 같이 우리의 욕구를 채우는 관계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란 단순히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 청년은 스캇 펙 박사와의 상담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

 

" 어머니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학교버스를 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답니다. 어머니에게 아무리 사정을 해도 학교 버스를 못 타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다칠까 봐 두려워 매일 차로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느라고 퍽이나 힘드셨을 겁니다. 어머니는 나를 정말 사랑했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참된 사랑일까요? 그는 그 청년의 소심함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사랑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고, 사랑인 것처럼 보이는 그 행동들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어쩌면 어머니의 그 행동은 헌신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청년의 자아 형성에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최 우선으로 합니다. 이는 신중한 판단과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수반합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이나,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넬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의 신시아 하잔 교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랑에 빠진 뒤 1년 후 열정의 50%가 감소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열정이 반으로 줄어드는 시기에 도달하면서 애틋한 감정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5) 이뿐 아닙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싫어하는 점을 찾아내긴 하지만, 부정적인 면은 잠시 잊은 채 좋아하는 점에만 집중합니다. 영국의 시인 Chaucer는 말합니다. "사랑은 눈이 멀었다." 6) 그러나, 우리가 이성을 찾게 되었을 때, 돌아오는 현실은 냉혹합니다. 나는 은행에 저금하기를 원하는데, 그녀는 핸드폰을 사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자기 자기 일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데, 나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취미와 편견, 그리고 생활리듬만 고집하려 들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제 정신을 차리고 사랑에서 빠져 나오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로 유명한 '스캇 펙'박사는 바로 이 순간, 즉 바로 한 쌍의 연인이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 그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참사랑을 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사랑에 빠지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며, 그것은 사랑의 크고 신비로운 전체 구도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겪은 임상적 경험을 세밀히 관찰하고 더불어 자기 관찰을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는 사랑이란 단순한 집착이나 열정이 아니며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사랑의 목적을 육체적이나 물질적이 아닌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정신적인 정신적인 성장이라는 말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의지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유발시키는 의지를 의미합니다. 무척 어려운 정의이지만 그는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통해 키워나가는 대상으로 정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으므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우리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으시고, 현실 속에서 이성을 되찾았을 때,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바로 그 때가 하나님과의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발전은 의지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을 자라게 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장 첫째 계명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네 열정과 간구와 지성과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주2)


나눔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거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온전한 관계의 삶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감정이나 열정이 아닌, 매일 매일 삶 속에서의 교재와, 사랑 안에서의 진실된 의지와 행동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에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유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온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2)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3) 엔하위키, http://mirror.enha.kr/wiki/사랑

4) 성경대사전

5) Vogue (2005년4월호) 원고 중,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aroong&logNo=80013920997

6) TED, Helen Fisher tells us why we love + cheat

 

주1) 신학적 접근으로는 하나님이 인격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격을 가진 것이라고 접근할 수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격을 가진 하나님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주2) 마가복음 12장 29절, 한글 메시지 버전을 참고하였습니다.


Posted by kkc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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