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컬한 말이지만, 영어회화 과목을 가르치면서 가끔 학생들이 우리말보다 영어로 말할 때 자기 마음을 더 잘 표현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문법도 많이 틀리고 어휘로 많이 부족하지만, 오히려 언어실력이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데는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말할 때는 어휘도 풍부하고 언어기술도 좋으니까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그럴듯하게, 장황하고 멋있게 할수 있다. 하지만 영어로 하자면 머릿속에서 마땅한 단어 찾고 주어 동사 맞추자니 너무 번거로워서 꼭 해야할 말만 가장 간략한 형태로 단도직입적으로 하게 마련이다. 즉 언어구사력이 좋다는 말은 그만큼 '위장술'이 좋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어를 배운다는것은 결국 언어 '기술'을 습득한다는 뜻이므로, 나는 회화시간에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말을 많이 하도록 만드는가에 대해 항상 고민한다.

그런데 동기유발이 잘되도록 재미있고, 생각과 토론의 소지가 많은 상황을 제시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오늘 학생들이게 준 토론 주제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토론주제)

곧 핵전쟁이 일어나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핵폭발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동굴이 하나 있고, 아래 있는 열 사람이 그 동굴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동굴에는 꼭 여섯 명 밖에는 들어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므로 생존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한국, 아니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할 것을 감안하여, 다음 열 사람 중에서 여섯 명을 선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

 

수녀(종신 서원을 했으므로 결혼할 수 없는 상태)

의사(공산주의자)

눈먼 소년

교사(일본인)

갱생한 창녀(그러나 언제라도 이전생활로 돌아갈 소지가 큰 상태)

여가수(품행이 나쁘기로 소문남)

정치가

여류 핵물리학자

농부(청각장애자)

나 자신(아무런 기술도, 능력도 없는 백수상태)

 

사람마다 하나씩 조건이 있어 학생들이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게끔 만들어진 문제였다. 그래도 토론을 시작하자마자 학생들이 별 의견교환 없이 간단히 제외시킨 인물은 정치가였다. 이유로는 '워낙 기회주의자인데다가 여섯 명을 가지고도 당을 만들어 서로 헐뜯고 싸우면서 새로운 한국의 분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는 것이다. 또 거의 만장일치로 살려야 한다는 인물은 '나 자신' 이었는데 학생들이 말하는 재미있는 이유는, 여섯 명이라는 숫자로 시작하는 나라이니만큼 우선 인구를 늘리는 것이 필수적인데, 아무런 기술이 없더라도 생산과 인구증식에는 큰 공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학생들이 의견의 일치를 본 인물은 청각장애자 농부로,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보급할 수 있으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여섯 그룹으로 나누어 두 그룹씩 앞으로 나와 토론하고, 좀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그룹을 투표하여 뽑는 토너먼트 식으로 운영했는데, 나중에는 가장 많은 득표를 한 A와 B그룹이 결승전을 벌였다.

물론 막히는 단어도 많았고, 문법이나 발음에 있어서 실수도 많았지만, 토론을 진행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들 가운데 일본인 교사와 눈먼 소년에 관한 토론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대충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본인 교사에 관한 토론이다.

A:우리 그룹은 이 사람은 제외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인이지 않습니까. 우리조상들이 박해 받은 36년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사람을 죽이고 일본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B:우리 그룹은 이 사람을 살리기로 했습니다. 물론 우리 조상들이 격은 아픔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입니다. 우리는 앞을 보고 살아야지, 뒤를 보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과거의 비극보다는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사회를 좀더 강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라 경제발전의 동지입니다.

 

A:물론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준 아픔은 너무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을 보십시오. 왜 그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일본사람들은 자기들의 전쟁을 위해 이용하고는 전쟁에서 패하자 자기민족만 데려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곳에 버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마루타 이야기 아시죠? 전쟁 동안 한국사람들을 생체실험용으로 썼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사람들은 너무 비인간적이고 비양심적입니다.

 

B:그건 비단 일본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땐 전쟁 중이었습니다. 전쟁 중엔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그저 잔인한 동물입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일지로 모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단지 일본사람이라는 이유로 죽게 한다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A:작년에 우리 대통령이 일본에 갔을때도 정신대문제에 대해 그들은 한마디로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젊은이들 대부분은 자기네 조상들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박해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B:우리토론이 본론에서 벗어나고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건 일반적인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상황에서는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이라는 것 외에 이 사람은 새로운 사회의 일원이 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한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A:바로 그겁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한국인을 가르칠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이들에게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가르치고 일본문화만 가르칠 겁니다. 즉 미래의 한국이 일본이 될 거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좋겠습니까?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A그룹이 더 많은 찬성표를 얻은 것은 물론, B그룹까지도 미래의 한국이나 아시아가 일본이 된다는 것에는 반대였다.

 

눈먼 소년에 관해서도 두 그룹은 의견이 엇갈렸다. A그룹이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면을 강조한 반면, B그룹은 인도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A:새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고, 여섯명 모두 어떤 형태로든 공헌해야 합니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B:눈이 멀었든 안 멀었든 간에, 그는 아직 어린 소년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살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무조건 어린이를 먼저 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A: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택기준이 되어야하는 것은 누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위해 어떤 공헌을 할수 있으냐는 겁니다. 소년의 경우는 너무 어리고, 따라서 육체적으로도 약하고, 아무런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데다가 볼 수조차 없는데, 어떻게 나라 세우는 일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B:그러니, 결국 눈이 멀어서 안 된다는 말 아닙니까?

 

A:그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죠, 소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에 아주 바쁠 겁니다. 누가 소년을 돌본단 말입니까?

 

B:그러나 눈이 멀었기 떄문에, 유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인간은 가끔 잔인한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약한 자를 동정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닙니까?

 

A:물론 우리도 소년을 동정합니다. 하지만 감상적이 되면 안됩니다. 좀더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건 실제상황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여섯 명이 힘을 합해 강하고 살기 좋은 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새로운 사회는 시작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 겁니다. 그런데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될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B그룹은 마땅하게 논박할 이유를 들지 못했다. '동정과 인간애' 에 대해 몇 명이 더 거들었으나, A그룹의 실리적인 측면을 꺾을 만큼 설득력을 갖지는 못했다. 분위기로 보아 A그룹의 논지가 많은 학생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B그룹에 속해 있던 진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나는 내심 놀랐는데 진기는 심하게 말을 더듬기 때문에 보통 토론할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것에 대해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지, 말없이 그냥 한구석에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나 다른 학생들은 진기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진기는 말을 더듬으며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년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을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커다란 공헌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는 여러분이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아주 바쁠 겁니다. 좋은 나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신없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그 사회에도 경쟁이 생기고, 질투와 미움이 사로잡혀 권력을 놓고 싸울 겁니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 이 눈먼 소년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자기 시간을 쪼개 그들 도와야 할겁니다. 그러면 남을 돕고, 남을 위해 나의 작을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교실이 조용해졌다. 진기가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듣는 것은 많은 인내심을 요했지만, 말더듬 증상 때문에 그가 어렵사리 하는 말은 어쩐지 더욱 진지하고 진실되게 들렸다. 잠시 쉬었다가 진기는 다시 입을 열어 결론을 지었다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 장영희 에세이 집 '내 생에 단 한번' 중에서 -

Posted by kkc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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