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미국 내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식탐에 대해 나무란 적이 없었다. 대체로 가톨릭의 개념이었던 7대 죄악은 교회에서 베푸는 성찬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미국의 많은 성직자들은 오랫동안 식탐 죄를 경계했다. 19세기 초반의 장로교 목사였으며 그레이엄 크래커의 발명가이기도 한 실베스터 그레이엄은 수시로 식탐을 윤리적인 배덕의 근원이라고 비난했다. 그레이엄은 식탐을 끝없는 악행으로 이어질 수 잇는 일종의 과다 자극으로 보았다.
나중에 식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좀더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1950년대에 역시 장로교 목사였던 찰스 셰드는 <기도로 살을 빼자>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했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뚱뚱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에 인간을 만들기로 했을 때 45킬로그램이 넘는 지방을 허리에 감을 계획은 없었다." 뚱뚱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어 모두에게 선사한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셰드는 그러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기도와 함께 하는 운동을 제안했다. 식사 시간에는 "오늘 나의 몸은 주께 속해 있습니다. 오늘 나는 주의 은총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주와 함께 식사를 합니다." 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신앙에 바탕을 둔 운동이 있었다.
그 한가지는 15분간 가라테 발차기를 하면서 잠언 3장을 암송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시편 19편을 들으면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딸들:복음주의 여성과 복종의 힘>의 저자인 R. 마리 그리피스는 셰드의 방법에 주목할 만한 이유로, "윤리적 양심과 긍정적 사고의 균형을 맞추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의 메시지는 <지방은 우리 머리속에 있다>를 출판한 1970년대 초반까지 존속했다.
... 물론 종교가 작은 죄들을 모르는 체하면 사회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종교는 허리띠나 적절한 식사량이나 격식을 갖춘 가족 식사와 같은 경계를 만들어낸다. 종교적 믿음은 윤리적인 공동체의 발전을 가져오고 윤리적 공동체는 개인의 행동을 지도하고 제한하는 구실을 한다. 20세기 초에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말했듯이, 종교의 '금지 체제'가 없다면 사회는 허우적거릴 것이다. <토인비는 인류 문명의 분열은 '문란한 의식에 굴복'함으로서 진행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려는 요점은 분명하다. 만일 뒤르켐이 말한 것처럼 하느님과 사회가 '하나'라면, 적어도 종교에 관한 작은 죄는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