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개인용도으로 Redhat을 깔았는데. yum이 안되더군요 yum을 누르면 아래와 같은 메시지가 뜹니다.
This system is not registered with RHN
CentOS는 Redhat의 쌍둥이 클론입니다. 즉 같은 rpm을 사용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Redhat 5 Update 2 => CentOs 5.2 와 같이 Update 버전에 따라서 서브 버전이 나뉩니다.)
게다가, 말로만 듣던 gcc버그때문에, gcc를 업데이트할 일이 있어서. 구글링을 하다가 관련 자료를 찾아서 함 시도해보았습니다. (http://www.linuxquestions.org/questions/linux-software-2/using-centos-repos-under-rhel-644632/)
1. /etc/yum.repos.d/rhel-debuginfo.repo 을 백업하고 삭제합니다. 2. /etc/yum/pluginconf.d/rhnplugin.conf 을 수정합니다. (사실 이건 상관없을것 같은데. 기분상 해줍니다 -_-)
[main] enabled = 0 gpgcheck = 1
3. /etc/yum.repos.d 디렉토리에 아무 파일이나 만들어서 .repo 를 생성합니다. 현재 전 WS5 update1 버전입니다.. 빨강 부분을 주의하세요 :)
# Cent.repo [base] name=CentOS-5 - Base baseurl=http://mirror.centos.org/centos/5/os/$basearch/ gpgcheck=1 gpgkey=http://mirror.centos.org/centos/RPM-GPG-KEY-CentOS-5
#packages used/produced in the build but not released [addons] name=CentOS-5 - Addons baseurl=http://mirror.centos.org/centos/5/addons/$basearch/ gpgcheck=1 gpgkey=http://mirror.centos.org/centos/RPM-GPG-KEY-CentOS-5
#additional packages that may be useful [extras] name=CentOS-5 - Extras baseurl=http://mirror.centos.org/centos/5/extras/$basearch/ gpgcheck=1 gpgkey=http://mirror.centos.org/centos/RPM-GPG-KEY-CentOS-5
#additional packages that extend functionality of existing packages [centosplus] name=CentOS-5 - Plus baseurl=http://mirror.centos.org/centos/5/centosplus/$basearch/ gpgcheck=1 enabled=0 gpgkey=http://mirror.centos.org/centos/RPM-GPG-KEY-CentOS-5
Total download size: 19 M Is this ok [y/N]: y Downloading Packages: warning: rpmts_HdrFromFdno: Header V3 DSA signature: NOKEY, key ID e8562897 Importing GPG key 0xE8562897 "CentOS-5 Key (CentOS 5 Official Signing Key) <centos-5-key@centos.org>" Is this ok [y/N]: y Running Transaction Test Finished Transaction Test Transaction Test Succeeded
한글 표현에 있어 가장 범용적인 EUC-KR의 경우 2Byte를 사용하게 되는데, UTF-8의 경우는 보통 3Byte를 사용한다. (오라클 및 기타 application)
한글 위키에는 이러한 사이즈에 대한 분류 카테코리가 알기쉽게 잘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영문 위키에는 이 카테고리가 알기쉽게 명시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http://en.wikipedia.org/wiki/UTF-8)
1. One byte is needed to encode the 128 US-ASCII characters (Unicode range U+0000 to U+007F). 2. Two bytes are needed for Latin letters with diacritics and for characters from Greek, Cyrillic, Armenian, Hebrew, Arabic, Syriac and Thaana alphabets (Unicode range U+0080 to U+07FF). 3. Three bytes are needed for the rest of the Basic Multilingual Plane (which contains virtually all characters in common use). 4. Four bytes are needed for characters in the other planes of Unicode, which are rarely used in practice.
즉, 무슨 이야기냐면,
(1) 한바이트는 ASCII 에 명시된 케릭터 128개 표현이 가능하다. (쉽게 알파벳) (2) 두바이트는 그리스아, 히브리어, 등등 라틴계통 언어나 몇가지 계통 언어 표현이 가능하다. (3) 세바이트는 일반적인 다국어 표현이 가능하다. (즉 한글의 범주다!) (4) 네바이트는 일반적으로 잘 안쓰이는 글들의 표현이 가능하다.
Proxying? 이라는 말은 쉽게 설명하면 보통 A라는 서버에서 B라는 서버에 접속할 때, A랑 B랑 길이 막혀 있다면, 돌아가는 중간다리 정도로 생각하시면 큰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비슷하게 Port Forwarding 이라는 것도 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22번이 ssh의 정식 포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내의 public에서는 22번 포트가 개방되어 있지 않다고 가정합시다. 하지만, 웹 포트인 80 포트는 열려 있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볼 수 있겠지요.
방안1) ssh를 80 포트로 연다. 방안2) 80포트로 들어오는 내용을 -> 22번 포트로 돌려서 데이터를 전송하게 한다.
방안 2를 쉽게 Port Forwarding 이라고 합니다. 방안 2를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리눅스에서는 iptables 라는 툴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룰이 워낙 복잡하고 옵션이 많아서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윈도우의 경우에는 마땅한 툴이 그다지 없습니다. 또 엉뚱한걸 받아 프로그램을 띄우면 스파이웨어가 있기도 하고. 무겁기도 합니다.
PlugProxy는 JAVA기반이라 OS Independent 한 데다가, 가장 좋은점은 별다른 설정없이 자바 PATH만 잡고 그냥 띄우면 됩니다. -_- 옵션도 간단합니다.
사용법) PlugProxy host rport lport 예제 1) 8080포트로 오는 내용을 22번 포트로 포워딩 PlugProxy localhost 22 8080 예제 2) 내 컴퓨터의 80포트로 오는 내용을 123.223.111.11의 80번 포트로 포워딩 PlugProxy 123.223.111.11 80 80
Contents를 저장하기 위한 서버를 사용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RFC 뭐시기 규약에 따라서, HTTP에서 PUT, GET, DELETE 를 처리해야 하는데..
그전까지는 리눅스용 아파치를 설치해본적도 없는 데다가..
아파치 옵션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겨우 셋팅 비스무리하게 했는데..
아파치가.. 아무리 설정을 해도
PUT, DELETE 액션에 대래서 Not Allowed 를 계속 토해내는 것입니다.
물론... 쉽게 PUT, DELETE를 받을 수 없는 아파치의 심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보안 정책도 맞게 설정해주었는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_-;
하나하나 뒤져가다가, 반나절만에 겨우 뉴스그룹에 적혀있는 한줄의 글을 발견했습니다.
mod_dav를 사용하세요.
mod_dav는 쉽게 HTTP를 RFC규약을 사용해서 파일서버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녀석입니다. 모듈을 풀고 디렉토리에 Dav ON 옵션을 넣으면 바로 동작합니다.
그런데, PUT 액션을 받을때 없는 디렉토리를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기능이 없어서,
생전 처음 모듈 컴파일도 했습니다.
아파치의 apache_install_root/modules/dav/main/의 파일들을 수정하고
apache_install_root/modules/ 에서 make install 하면 모듈 컴파일이 됩니다. 오...
apache_root에서 /module 에 가면 모듈.so 화일이 생성되는군요.. 신기해라 ;;
이 모듈은 아파치를 재시작하면 바로 적용이 가능하며,
다른 로그 모듈을 참고하면 로그도 뺄 수 있습니다..
싫어하는 누군가를 찾아라. 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의 인터넷사이트를 찾아라.
사이트에서 무작위로 몇 개의 단락을 찾아내라.
인터넷 서비스 회사에게(Internet provider) 그 단락이 저작권 위반이고, DMCA(Digital Millennium Copyright Act:디지털 밀리니엄 저작권법)를 위반하고 있다고 항의 메일을 보내라. 당신은 DMCA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 단락이 정말 저작권을 위반했는지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단지 네가 그 저작권 소유자이고, 이 단락이 당신의 허락 없이 고등학교 졸업논문을 복사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말해라.
인터넷 서비스 회사 중 열에 아홉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별다른 조사 없이 그의 계정은 닫칠 것이다. 당신의 적은 인터넷 공급자에게 추방당할 것이다. 와-우!
아주 오래 전, 전화가 정부의 독점시스템이었을 때, 저작권 소유자들은 전화 사용자들이 그들의 저작권을 가진 자료를 전화로 보내는 것을 시도했을 때, Ma Bell(주: 미국 전신전화회사 AT&T 나 벨 오퍼레이션 회사의 속칭)의 고소를 시도했다. 왜 그들은 전화회사를 고소했으며, 저작권이 걸린 자료를 보내는 사람을 먼저 고소하지 않았는가? 같은 이유로, Willie Sutton은 은행으로부터 돈을 강탈했다: 문제는 ‘돈이 어디에 있는가’ 이다. (주: 전설적인 악당 Willie Sutton은 왜 은행을 털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왜냐하면 은행이 돈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했다.)
전화회사들은, 물론,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전화의 저작권을 찾아 따질 수도 없다. 그리고, 법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했다. 같은 종류로, 누군가 단지 전달자로서의 일만을 하고 있다면, 미리 알고 있지 않는 한 전달하는 데이터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없으며 데이터의 부산물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질 수 없다.
인터넷 초기에, 전화의 경우와 비슷한 발생했다. 만약 당신이 비트들을 A에서 B로 전달하도록 나를 고용했다면, 그 비트가 무엇이던 간에-완전 랜덤비트던, 저작권 위반이던, 청구서던, 러브레터나 뮤직비디오던- 나는 내용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나는 단지 비트들을 전달할 뿐이다. 이것은 이치에 맞는 합법적 이야기이다.
불행하게도, 이치에 맞는다는 것은 음악산업에 있어서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MP3의 공유 때문에 아티스트를 통하여 그들의 주머니로 들어갈 상당한 돈을 받지 못해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작권 침해에 대한 좀 더 강한 힘을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A에서 B로 비트들을 옮기는 산업에 책임을 지게 만들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Willie Sutton이 말했듯, 거기 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강하게 오랫동안 로비를 펼쳐서, DMCA를 통과시켰다. 법에 의하면, 비트들은 그것이 합법적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조항이 붙는다: 만약 네가 A에서 B로 비트들을 옮긴다면, 당신은 전달하는 내용에 대한 책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어디의 누구의 어떤 항의에 대해서도 따라야 한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지는 생각하지 마라, 만약 원한 있는 어떤 바보가 그들이 원하는 어떤 사이트로부터, 그들이 단지 한 장의 편지를 보내는 것만으로. 어떤 것을 검열하는 기술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마라. 그들의 불평이 합법적이던 아니던 운반자는 “감옥에 안가는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들은 특별한 조사 없이 당신의 검열 요청을 따를 것이다.
이건 엉터리 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능산업이 로비를 펼쳐 나라의 법을 쓰게 만들었을 때 얻은 결과다. – 조엘(Ed)
원문 : The Best Software Writing I - Joel Spolsky pp.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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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DMCA가 뭔지 정말 궁금했는데 미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냅스터소송 사건의 주역이 바로 이 법이었다! 쉽게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저작권법.
물론 이 법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뭐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결국 돈의 문제가 되버리니까. 쩝
우리나라 음반협회도 이런 힘을 가지고 마구 휘두르고 있는것 같지만,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좀 과하긴 하지만 마구 틀린거 같지는 않다만.. 음반협회의 이익과 아티스트들의 발전과의 상관관계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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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is a neat trick. Try it at home.
Pick someone you hate. Doesn’t matter why.
Find their website.
Find some random paragraph on their website.
Send a letter to their Internet provider complaining that paragraph is a copyright violation, and invoke the DMCA. You paragraph is a copyright violation, and invoke the DMCA. You don’t even have to know what DMCA stands for. And of course the paragraph doesn’t have to be a copyright violation. Just say that you’re copyright holder and the paragraph in question was copied out of your senior thesis in high school without your permission.
Nine out of 10 times, that’s all it takes. Your enemy gets kicked off his Internet provider and his account is closed down. Ta-da! Instant vigilance justice.
Many, many years ago when the phone system was a government-regulated monopoly, copyright owners tried to sue Ma Bell when telephone users tried to use the phone system to transmit copyright material. Why did they sue the phone company and not the person sending the copyright material in the first place? For the same reason Willie Sutton robbed banks: that’s where the money was.
The phone companies, of course, weren’t responsible and couldn’t possibly serve as copyright police for every phone conversation, and the law grew to recognize this. In the case where someone is merely acting as a common carrier, carrying all data regardless of content without prejudice, they can’t be held responsible for the legal ramifications of that data.
In the early days of the Internet the same legal principle was brought over from telephony. If you hire me to deliver bits from point A to point B, no matter what those bits are-completely random bits, copyright violations, ransom notes, love letters, or music videos-I’m not responsible for the content; you are. I’m just delivering’ bits. It’s really the only legal principle that makes sense.
Unfortunately, making sense wasn’t good enough for the music industry, already apoplectic in rage at the amount of money they weren’t able to divert from artists into their own pockets because MP3 trading. They wanted more power to prevent piracy, and they wanted to be able to go after the responsible businesses that contract to move bits from point A to point B. because, as Willie Sutton said, that’s where the money was. So they lobbied hard and long and won the passage of the DMCA, a nasty bit of legislation that adds on innocuous-seeming provision: if you move bits from point A to point B, you won’t be held responsible for the content you deliver, but only if you agree to take down anything anyone complains about.
Never mind if that makes sense, never mind if that gives every schmuck with a grudge the practical ability to censor anything they want on any website they want merely by sending a letter. It doesn’t matter if the gripe is legit or not; the carrier needs to be able to use their “get out of jail free card” so usually they’ll comply with your censorship request without investigating.
It’s crappy law, but that’s what we get when we let the entertainment industry lobbyists write our laws – Ed (Joel)
조엘이 소개하고 있는 글 : http://www.boingboing.net/2004/11/06/save_canadas_interne.html
옷가지와 장난감들은 해외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해외인력이 훨씬 저렴한데도, 소프트웨어는 그렇게 만들지 않는가?
많은 미국 IT회사는 소프트웨어 개발을 인도에 맡기고 있다. 작년 HP는 인도에서 10,0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한 사상 최대의 고용주가 되었다.
아웃소싱에 열광하고 있는 회사는 90% 이상 인터넷 관련 회사이다. 벤처투자자에 대한 최근의 글을 함께 집필했던 Ravi Chiruvolo에 의하면 그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벤처 투자자들은 인도인들처럼 우수하고 저렴한 엔지니어들을 통해, 낮은 가격에 효율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웃소싱을 결정한다. 그들은 ‘나이키가 신발을 해외에서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같은 논리로 오라클은 인도의 6,000명의 엔지니어를 두 배 이상 늘릴 예정이라고 선언했다.
물론, 이러한 아웃소싱들은 미국 밖으로 일자리가 빠져나가는 원인이 된다. 이 글은 미국 내의 일자리가 빠져나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제경제사회에 살고 있으며, 실제로 인도 사람들은 미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만큼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 회사들은 외국에서 사람을 고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난 받는다.
회사가 일의 효율성(operational effectiveness)과 전략(strategy)을 혼동할 때 아웃소싱의 문제가 발생한다. 효율성은 일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하는 것에 대한 것이며, 전략은 IT회사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때처럼 장기적인 경쟁에서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경쟁력을 만드는 것이다.
아웃소싱 프로그래밍은 개발 소프트웨어가 회사 제품의 핵심이 아니라면 무척 효율적이다. 예를 들면, 웹 사이트 디자인, 백-오피스 소프트웨어(지불모듈, 재고 관리)와 같은 외부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아웃소싱은 효율성을 증가시켜 준다.
그러나, 핵심기술이 되는 프로그램은 조립하듯 만들어질 수 없다. 핵심기술이 되는 프로그램은 숙련된 기술과 디자인을 요구한다. 해외의 프로그래머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들은 근본적인 이익을 창출하지 못한다. IT 회사가 소프트웨어 개발을 아웃소싱 할 때, 회사는 그들의 핵심기술과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왜 몇몇 소프트웨어 회사는 초콜릿과 박스를 혼돈하는가?
최근 나는 전문매장에서 친구를 위한 초콜릿 선물을 샀는데, 이 초콜릿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Jean-Marc Gorce는 미국의 최고 10위 안에 드는 조그마한 수공 초콜릿 가게의 주인이다.
최근 Jean-Marc씨는 금색과 파란색의 상자에 초콜릿을 담아 파는 것을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이 상자가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이 상자는 그의 부인이 디자인했으며, 필리핀에 있는 회사에서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양을 저렴한 가격으로 주문하고 있다고 했다.
Jean-Marc씨의 금색과 파란색 상자는 아웃소싱의 좋은 예이다.
Jean-Marc는 초콜릿을 파는 것이지 박스를 파는 것이 아니
다. 디자인과 초콜릿은 그의 핵심 기술이다. 진마크씨는 그의 일의 효율성을 위해 최고의 초콜렛 제작자라는 평판을 희생하지 않고 상자를 아웃소싱 하였다.
아웃소싱한 초콜릿 상자들이 제작자인 Jean-Marc씨의 일에 효율성을 주는 동안, 그는 초콜릿 제작에 대한 아웃소싱을 절대로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핵심 기술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미국 IT 회사들은 원가절감의 목적아래서 그들의 핵심기술과 전략적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디자인과 생산은 다르다
소프트웨어 회사가 정형적인 제품으로서의 소프트웨어 생산을 시도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80년대의 일본 회사들은 프로그램 생산 공장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그들은 많은 프로그래머를 투입하는 것이 핵심 소프트웨어 개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소프트웨어와 달리, 옷과 장난감등을 아웃소싱으로 생산하는 것은 무척 합리적이다. 대부분의 옷과 장난감 생산에 드는 비용은 제품생산이지 디자인이 아니다. 이러한 상품들은 회사 본사에서 디자인되며, 단가를 낮추는 어느 곳에서나 생산될 수 있다.
프로그래밍은 디자인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제작 비용은 프로그램 작성에서 비롯된다. 소프트웨어에서 제품생산이란 단지 최종 프로그램을 디스켓에 복사하고, 매뉴얼과 함께 박스에 넣는 것에 불과하다.
전략과 경쟁력에 대한 세계적 전문가인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Michael Porter은 일의 효율성만을 고려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경쟁사와 본질적으로 같은 제품을 만들기를 시도한다면, 당신은 크게 성공하기 힘들 것입니다. 경쟁사는 당신과 동일한 제품을 만들어낼 것이고, 어쩌면 오랫동안 더 잘 만들 것입니다. 특히, 정보와 자금이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오늘날에는, 경쟁력 없는 일에 경쟁력을 거는 것을 최고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성능적인 효율성만 추구하고 있다면, 아마 당신도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웃소싱이라는 유행은 단순히 프로그래머의 실직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회사의 기술경쟁력을 잃어버린다는 문제를 가진다. 그들의 프로그래밍 기술을 아웃소싱한 IT 회사들은, 결국 그들의 경쟁력을 잃어버릴 것이며, 프로그래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직업을 잃어버리게 만들것이다.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2A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정설-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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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인터넷 어디인지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살았던 그의 삶이지만..
역시.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자의 것이다.